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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깨우는 부처님 법문

[연화사 원조도안 주지스님 법문] - 마음이 향기로운 사람(40)·(41)

마음이 향기로운 사람(40)

생각의 문을 열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닭이 없으면 달걀이 없고, 달걀이 없으면 닭이 없다.
무엇이 먼저일까?

아무리 뛰어난 생물학자나 천지를 꿰뚫는 논리학자도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설명할 수가 없다.
논조나 논리로 과학으로도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사물의 깊이를 들여다보면, 둘 아닌 것이 없다.

사찰 입구에 불이문(不二門)이 있는 것은 근거가 없는 천지 
창조설보다 과학적인 불교의 진실한 가르침임을 알아야 한다.

해와 달이 둘이 아니요! 낮과 밤이 둘이 아니요!
전화 전기선이 둘이 아니요! 불과 물이 둘이 아니요!
남과 여, 숫놈과 암놈이 둘이 아니다.
시와 비가 둘이 아니요! 선과 악이 둘이 아니란 말이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 우주 만물의 생과 멸이란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연에 의해서 멸한다.
닭과 달걀이 둘이 아닌 비유의 정답은 “인연”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도 둘이 아닌 조건에서 하나가 될 때

성공이 이루어진다는 진리에 눈을 떠야 한다.
기회주의적으로 논리나 계산에 맞추어 하면 그 수명이 짧다.
불교의 가르침인 보리행, 보살행에서 지혜를 얻어야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마음에서는 좋은 결과가 애당초 싹이 틀 리 없다.
설혹 싹이 트더라도 그 성장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무엇이 청정(淸淨)한가? 
하기 자성(何期自性)(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천하를 다 가져도 자기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조직의 리더, 돈과 부의 권력자가 늘 “보살행”(대승)을 실천할 때, 그 생명선이 건강해진다는 도리다.
“보리”와 “보살행”이 없으면, 명분의 족쇄에 매여 늘 허덕이며 살게 된다.
청정한 삶에 집중하는 것이 “삼매”요!
삼매에 살아가려는 일심이 “반야”다.
둘이면서 하나인, 반야와 삼매를 육조 스님께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셨다.

불교를 남보다 많이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불자가 많다.
부처님은 논리적으로 따지고, 타산하는 사람보다는

적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닭과 달걀만 따져서는 정답을 얻을 수 없다.
복이란 것은 육바라밀을 실천할 때, 받을 수 있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행심 반야(行深般若)라 한다.
무엇을 도울 것인가? “생각의 문을 여는 일이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마음이 향기로운 사람(41)

시기와 질투

삶이란 시기와 질투의 장이다.
남을 시기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질투한다.
자기를 이겨내는 수양이 없으면 시기와 질투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불행을 자초한다.
현명한 사람, 자기 수양을 쌓은 사람은 시기를 통하여 자기를 연마하고

질투를 통해서 자기 성찰을 반조하여 성숙해가는 사람이다.
시기와 질투에 갇히면 보고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게 된다.


사람의 마음을 충동하여 조계사가 무너지라고 광란하는

인터넷 동영상의 청년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은 남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강요하여 사랑받으려 하지 말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천지만물) 것은 자유를 원한다.
나와의 관계가 조금 소원하더라도 인내하며 기다려줘라.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오해하여 연인 간, 부부간,

친구 간, 동료 간,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 세상에 시기와 질투를 오해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이 태산보다 높다.

 

소중하고 귀한 청년이 마이크를 잡고 조계사가 무너지라고 광란하는 모습은

오해와 시기에 갇혀 질투에 미친 처참한 “아수라”의 모습이다.

부처님의 법을 질투하고 시기하여 세상에 아무런 피해나 질곡을 주지 않고,

만유 중생을 자비심을 일깨우는 청정한 도량을 무너져라 외친다.

아까운 청년을 처참하게 만든 예수교의 위정자들의 들추기는 죄가 하늘을 찌른다.
 

혹여 우리들도 자기의 일상에서 오해하여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고 있는지,

연인 간, 부부 간, 친구간, 동료 간을 돌아보기 바란다.
오해는 풀면 그만이다.
그러나 풀지 않으면 산더미 같은 태산으로 부푼다.
오해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생에서 나온다.
그래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먕(皆是虛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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