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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1919년 4월 8일 임은동 만세운동, 100년 만에 재현”

임은동 출신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 서훈 신청

오는 4월 8일(월), 구미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일원에서 100년 전의 임은동 만세운동이 재현된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지회장 전병택)는 영남민요연구회(회장 배경숙)와 함께 이날 저녁 7시부터 시까지 왕산초등학교에서 소리극 <왕산 허위 선생>을 공연하고 왕산기념관까지 행진하여 기념관 앞에서 그날의 만세 시위를 재현하기로 한 것이다.

 

영남민요연구회가 공연하는 <왕산 허위 선생>은 왕산의 주요 행적을 연극으로 재현하면서 사이에 토속민요를 연창하는 방식의 소리극으로 이 공연은 영남민요연구회 ‘구미 아리랑제’를 겸한 행사다.

 

기념관 앞에서 열리는 만세 재현 행사에는 애국가와 독립군가가 연주되고, 어린이들의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삼창으로 끝나게 된다. 민문연 구미지회는 이번 재현 행사가로 유서 깊은 항일투쟁의 근거지였던 임은동에서 100년 전의 의기를 되살리는 동시에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가다듬는 기회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임은동 만세 시위는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고향인 구미면 임은동의 강용준(姜龍浚)·유시동(劉時東)이 계획하여 1919년 4월 8일 밤 10시, 300여 명 주민이 임은동에서 밤늦도록 ‘독립만세’를 외친 의거이다.

 

이 소식을 듣고 이튿날, 선산경찰서 경찰 4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그리고 인동의 일본군 헌병주재소 헌병 2명이 달려왔으나 이미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몸을 피해 아무도 잡히지 않았다. 4월 15일에 일본 군인과 경찰이 마을을 급습하여 강용준·유시동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 30여 명을 붙잡아 갔다. 그러나 이들의 관련 재판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4월 2일(화) 오전 11시 50분, 민문연 구미지회 장기태 서훈추진위원장과 신문식 회원(구미시의원)은 대구지방보훈청에 임은동 출신 허형식(1909~1942)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왕산 사후 임은동 허씨 일가의 만주 망명 이후,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들어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군장 겸 총참모장에 오른 허형식 장군은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이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76만 명으로 늘린 관동군으로 토벌 작전에 나서자 중국공산당은 항일연군 지도부와 잔여 병력을 소련 영내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허형식은 끝내 소련 국경을 넘지 않고 소부대 활동으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북 유격전구와 인민을 지키다 1942년 8월 이른 새벽, 경안현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만주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1942년 소련 극동군은 동북항일연군의 잔류대원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성하면서 간부들을 소련군으로 편제했는데 이때 북만주의 허형식도 이 부대에 일방 편제되었다. 그는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의 핵심이 되는 최용건(부참모장), 김책(정치위원), 김일성(영장)과 같은 ‘영장(營長)’이었으니 소련은 그를 김일성과 동급의 지휘관으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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