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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명작소설 = 남이(南怡) 장군 제6회 (終)

 

 

 

권우상(權禹相) 명작소설 = 남이(南怡) 장군 제6회

 

 

남이(南怡) 장군

 

 

이징옥 장군이 관군에게 체포되고 이시애를 추격하던 이준은 추격을 그만두고 평정지역의 민심을 안무하는 한편 남이에게 군사를 주어 샛길로 나아가 이시애의 퇴로를 막게 하였다. 남이는 이준의 명령에 따라 경성을 지나쳐 두만강가의 회령에 진을 쳤다.

이시애가 나타나면 곧바로 공격을 개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시애는 이미 잡혀 있는 상태였다. 이징옥이 체포된 사실을 알고 깊은 감회에 젖은 채 강 건너편을 응시하던 남이는 즉흥시 한 수를 지었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 먹여 없애리(豆滿江水飮馬無)

남아 20세 되어 나라 평정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後世唯稱大丈夫)

 

읊고 읊고 또 읊어 보아도 대장부의 사나이의 기개가 넘치는 한 수의 시였다. 남이는 천하가 자기의 한 호통소리에 모두 굴복하는 환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시 한번 시를 읊고 난 남이(南怡)의 곁에 어느새 다가오는 한 그림자가 있었다.

“허허허허, 과연 장부다운 시입니다.”

크게 웃으며 다가서는 사람은 유자광이었다. 그는 전에 호조참의를 지낸바 있는 유규의 서자인데 무예로 남다른 재질이 있는 장사였다. 유자광의 눈꼬리가 남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사내 대장부다운 힘이 넘쳐 흐르는 남이의 시를 보는 순간 질투심이 끓어 올랐으나 꾹 참고 있었다.

이때의 남이는 어찌 이 한 수의 시로 인하여 유자광이 자기를 모함하는 구실이 되었을 줄이야 생각인들 하였겠는가. 왕(세조)은 토벌군을 보낸 다음 불면증이 더욱 악화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단종이 왕위에 있을 때 이징옥 장군은 자칭 황제라 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쉽게 평정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반란으로는 이번 이시애의 반란이 가장 큰 것으로 세조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러던 중 허유례가 운위원(雲委院)에서 계교를 썼다. 이시애 형제가 머물고 있는 경성(境城)에서 굿판을 벌리기로 했다. 차일 두 개를 치고 하나는 무당이 굿을 하는 차일로 써고 하나는 구경꾼들의 차일었다. 하지만 구경꾼 차일로 끌어 들이기까지가 문제였다. 허유례는 굿판을 벌리기로 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시켰다. 이 굿판을 보기 위해 이시애, 이시합 형제는 차일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차일 안에 들어선 이시애 형제는 독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자 이시애 형제를 차일로 덮어서 뚤뚤 말았다. 뒤이어 오랏줄을 준비하고 차일을 칼로 찢어 힘 들이지 않고 이시애, 이시합 두 형제를 생포했다.

포박당한 두 형제는 곧바로 군영으로 끌려 나갔고 관군을 이끌고 있는 이준이 보는 앞에서 이시애, 이시합 두 형제는 참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해서 이시애 난은 평정되었다. 반란군 평정의 장계가 조정에 전해졌고, 뒤이어 이시애, 이시합 두 형제의 수급(首級)이 운반되었다. 이준은 내친 김에 함길도를 두루 살피면서 민심을 안무한 다음 한양으로 돌아왔다. 왕(세조)은 경희루에서 개선 장병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 토벌군의 승전을 진심으로 환영하노라. 그 충성이 가상하니 이준 이하 41인에게 적개공신(敵愾功臣)의 영예를 내리노라.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하고 반적의 연루자들은 모두 원변으로 유배하노라 -

 

이로써 이시애의 반란사건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남이는 이시애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또한 이듬해에는 오위도총부총관을 겸하고 병권의 수장인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처럼 남이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자 조정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않았다.

특히 한명회는 남이의 빠른 출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왕(세조) 14년 봄, 유자광은 한명회를 만난 자리에서 남이가 이시애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두만강 강가에서 지은 시를 문제 삼기 위해 한명회에게 남이의 시(詩)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대감, 남이가 지은 시 가운데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末得國)이란 말이 있는데 대감은 이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하자 한명회는 눈을 크게 뜨고 남이의 시를 보았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 물은 말 여 없애니)

男兒二十未得國(남자 20세 되어 나라를 얻지 못하면

後世唯稱大丈夫(누가 후세에 대장부라 부를 것인가)

 

“으음, 남아 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 후세유칭대장부(後世唯稱大丈夫)라...”

그렇게 중얼거리던 한명회는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다.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이란 남자 나이 20세가 되어 나라를 얻지 못하면 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심상치 않는 얼굴을 감지한 유자광은 입을 열었다.

“대감은 이 시를 반역의 뜻이 숨어 있는 시라고 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는 남이가 어디서 지은 시자 맞는가?”

“이시애가 관군과 싸우다가 경성으로 도주하게 되었는데 이준 장군께서 남이에게 군사를 주어 샛길로 나아가 이시애의 퇴로를 막게 했습니다. 남이는 이준 장군의 명령에 따라 경성을 지나쳐 두만강가의 회령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때 두만강을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어 지은 시입니다”

“으음.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구만”

한명회의 말에 유자광은 말했다.

“소신도 그리알고 대감께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한명회는 심각한 얼굴로 턱밑의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이의 빠른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명회는 꼬투리가 잡혀 잘 되었구나 싶었다.

“이를 어떻게 처결할 요량이십니까?”

유자광의 말에 한명회는 말했다.

“전하께 말씀드리고 전하께서 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의중을 떠봐야 하지 않겠소.”

“전하께서도 이 시를 보시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물론 그렇겠지. 아무래도 미득국(未得國)이란 귀절이 불순하게 느껴지는구만.”

“그렇습니다. 이 시를 보면 이시애 반란이 평정되고 나라가 평온해 진 뒤에는 누가 임금이 될 것인가 하는 뜻이 아니옵니까? 대장부라는 것은 바로 임금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한명회는 다시 한번 턱의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이튿날 한명회는 대궐 편전 에사 왕(세조)을 만난 자리에서 남이의 시를 내놓고 말했다.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 후세유칭대장부(後世有稱大丈夫)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명희의 말에 왕(세조)은 남이의 시를 보고 나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아이십미득국이라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미得國)... 나라가 평온해 진 뒤에는...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를까.. 이런 말이렸다”

“전하!, 여기서 대장부란 말은 임금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이시애란이 평정되고 나라가 평온해 진 뒤에는 누가 임금이 될 것인가 하는 뜻이옵니다. 반란의 뜻이 담긴 것이오니 죄를 물어시옵소서.”

“이 시를 어디서 입수했는가?”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킬 때 출정한 유자광이 두만강에서 남이가 직접 읊는 시를 들었다고 하옵니다.”

“의금부에 지시하여 남이를 하옥하고 그와 연루된 자를 모두 잡아들여 문초하도록 하라.”

갑자기 역앋된 왕(세조)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명회는 의금부에 지시하여 즉시 남이를 하옥하고 그와 연루된 자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남이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하고 남이는 즉시 의금부에 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말하기를 이시애난을 평정하기 위해 두만강가에 이르자 새벽 하늘에서 혜성이 출현했는데 이는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시애난이 평정되면 적절한 때를 이용하여 거사를 하겠다고 말했사옵니다”

하고 진술했다.

본래 유자광은 서자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이었다. 유자광은 천성이 간사하고 계략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자는 남이를 비롯하여 민허,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랑, 고복로, 박자하 등이었다. 남이의 측근인 민허는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게 대한 방어계획을 논의 할 때 요즘 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奸臣)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당할까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奸臣)은 한명회라고 했습니다.”

하고 진술하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더욱 강해졌고,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있던 겸사복장 문효랑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랑은 여진족 출신 장수로서 남이와 함께 이시애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문효랑은

“언젠가 남이의 침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남이는 하늘의 변화를 기회로 간신들이 모반할 징조가 엿보임으로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으며 그리고 이 거사에 강순도 뜻을 함께 하고 있으니 왕이 산릉에 갈 때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한 다음 영순군과 구성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임금이 되겠다고 했사옵니다.“

하고 진술했다.

문효랑의 이러한 진술로 남이로 하여금 역모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마당에 아니라고 진실로 버티어 봐야 가흑한 문초만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이는 역모를 모두 인정하고 강순 역시 시인했다. 이 역모 사건으로 남이장군과 이징옥 장군을 비롯하여 민허,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랑, 고복로, 박자하 등 40여 명이 처형당했다. 충신이 한 사람의 간신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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