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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명작소설 = 남이(南怡) 장군 제3회




권우상(權禹相) 명작소설 = 남이(南怡) 장군 제3

 

           

               남이(南怡) 장군

 

 

 

이 말을 믿고 여진족의 추장 고을동개를 비롯하여 4백여 명이 조선군 관문에 도착하자 이징옥 장군은 그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놓고 풍성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술 취한 틈을 타서 미리 준비해 둔 복병을 시켜 섬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4백여 명의 여진족 추장 가양기 등 의심을 품고 관문을 넘어오지 않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 여진족의 추장들을 거의 섬멸시킨 이징옥 장군은 출동 명령을 내렸다.

총공격하라! 총공격하라!” 이징옥 장군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조선군의 좌군 기마병들은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말발굽에서는 하얀 먼지가 일면서 일제히 여진군의 진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김종서 장군과 이징옥 장군은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섰으며 우군 지휘관인 남이 장군도 10만을 이끌고 경흥을 향해 진군했다. 조선군의 공격에 여진군은 기세가 꺾여 마을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김종서 장군은 이징옥 장군과 함께 마을을 공략하여 여진의 잔병들을 패주시키고 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성 앞에 이르자 여진군이 결전을 다짐하며 조선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군은 먼저 항복을 종용했으나 여진군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여진군의 거센 화살에 공격을 뚫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군과 여진군의 밀고 당기는 피를 말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지만 전혀 진전의 기색이 없자 김종서 장군은 이징옥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이 저물면 사태가 우리에게 불리할 터이니 그대가 부장들과 협력하여 적진을 돌파해 줘야겠네

김종서 장군의 말에 이징옥 장군은 말했다.

소장이 일찍이 나라에 충성 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장군께서 저를 장수라고 하며 조정에 특별히 간청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해 주셨으니 오늘이야말로 저의 한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하겠습니다.”

이징옥 장군은 그렇게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방패를 앞세우며 부장들을 거느리고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 적진으로 달려가 적장 다섯 명을 단숨에 쳐 죽였다. 조선군과 여진군 양쪽군사는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징옥 장군은 막무가내 달려드는 여진군을 칼로 내리치자 군사의 피가 솟구치면서 이징옥 장군의 몸을 붉게 물들었다. 이때 검은 구름떼가 몰려 오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조선군과 여진군은 피차간 악귀와 같은 모습이었다.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면서 비명소리와 함께 붉은 칼 끝에 튀오른 피는 붉은 빗방울이 되어 흘렀다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여진군에게 불리했다. 여진군의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 더 이상 싸울 군사가 없었다. 김종서 장군과 이징옥 장군을 상대로 싸우던 여진족 장수들은 위기에 몰리자 갑자기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고, 많은 희생자를 낸 여진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후진에 있던 조선군이 합세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여진군은 대패하고 도망쳤다. 승기를 잡은 조선군은 크게 기세가 살아났고 그 틈을 이용하여 김종서 장군은 휘하 부대와 좌우군을 총출동시켜 여진군 잔병을 추격하여 일시에 궤멸시켰다.

이렇게 첫 승리로 장식한 김종서 장군은 이징옥 장군에게 비단 30필을 주어 포상하고 이징옥 장군으로 하여금 생존한 여진군의 장수 아바하이(阿巴亥)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아바하이의 여진군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군이 역습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군 진영으로 너무 깊숙이 파고든 여진군은 12백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했다.

한편 남이 장군이 이끄는 우군은 경흥, 온성 등 여진의 35개 촌을 격파하고 이징옥 장군이 이끄는 좌군은 여진의 32개 촌을 격파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그리고 이징옥 장군의 선봉부대도 여진족 마을 37개 촌을 격파하여 3천여 명을 죽이고 5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세종대왕은 크게 기뻐하여 승전보를 가지고 온 녹사 이도번에게 7품 벼슬을 주고 좌부승지 심우와 내시형부원외랑 한지려를 전선으로 파견하여 김종서와 이징옥, 남이 장군을 칭송하는 파발을 띄웠다.

여진족 삼백여 촌락을 장악한 조선군은 곧 각 방면으로 이징옥. 남이 장군들을 보내 국경선을 결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두만강을 경계로 회령, 경원. 온성, 종성. 경흥. 부령 등 육진을 조선 영토로 확고히 하는 한편 이곳에 6개의 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징옥 장군은 부장과 함께 군사 1만을 이끌고 길이 좁은 산촌의 길을 지나다가 여진군의 급습을 받은 것이다.

이때 조선군은 거의 죽거나 흩어지고 이징옥 장군을 비롯한 겨우 1000여 명만 고립되어 적과 항전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징옥 장군은 적의 화살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징옥 장군은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때 기적처럼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남이장군이 기마군 5만여 명을 인솔하고 돌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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