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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연재소설 - 제7의 왕국 제1부 (22회)





권우상 연재소설 = 7의 왕국 제1(22)

 

7의 왕국

 

왕건은 견훤의 장수들에게

우리나라 장수에게 패했으니 너의 나라 장수들의 검술은 아직 우리만 못하다. 약자가 강자에게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너의 나라 왕이 제의한 화친을 받아 들이겠다.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왕건도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견훤의 화친을 수락했다. 조물군(경북 안동 부근) 전투에서 견훤은 자신이 타고 있던 말 한 필을 잃었다. 왕건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연추(淵酋)가 견훤을 겨냥해서 던진 창이 빗나가 말에 맞았던 것이다. 말이 쓰러져 견훤을 호위하고 있던 장군들이 재빨리 견훤을 다른 말에 옮겨 타도록 했지만 말은 죽고 말았다. 견훤이 왕건에게 화친을 제의한 것도 연추가 던진 창에 자칫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왕건(王建)이 견훤(甄萱)과 화친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애(景哀)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급히 보내어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견훤(甄萱)은 마음이 변덕스럽고 이랬다 저랬다 하며 믿을 수 없는 인물이니 화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이라도 견훤과의 화친을 파기하심이 옳은 줄로 압니다 -

 

이러한 경애왕의 글 내용에 왕건도 고개를 끄덕이었다. 하지만 이미 화친을 해 놓고 파기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왕건에게 인질로 와 있던 견훤의 친족인 진호가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진호의 시체를 견훤에게 보내자 견훤은 왕건의 부하들이 죽였다고 판단하여 크게 분노하여 견훤에게 인질로 와 있던 왕신을 참수한 후 군대를 이끌고 웅진까지 진군(進軍)해 왔다. 왕신은 왕건의 사촌동생이었다. 사촌 동생을 죽이고 군사까지 일으킨 견훤에게 대적하고 싶었지만 왕건은 울분과 감정을 자제하고 각 성주에게 성()을 굳게 지키되 직접 나가서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애왕은 사신을 급히 왕건(王建)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친서를 전달했다.

 

- 견훤은 화친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출병하였으니 반격을 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늘이 도와 반드시 견훤의 군사는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견훤의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이 서찰(書札)을 본 왕건은 신라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견훤과 싸우지 않는 것은 견훤을 두려워서가 아니오. 다만 견훤의 마음 속에 죄악이 가득 담겨 있어 그 죄악으로 스스로 쓰러질 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오. 하지만 스스로 쓰러질 기세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 견훤을 칠 것이오. 그러니 신라에 돌아가거던 왕께 그리 전하시오!”

 

사신은 대답을 하고 신라로 돌아갔다. 왕건(王建)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견훤(甄萱)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공격할 기회가 보이자 왕건은 2만의 군대를 궁술대. 창검대. 기마대 세 편대로 나누어 후백제의 용주(경북 용궁)를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 신라 경애왕은 왕건의 출병을 기뻐하며 5천의 군대를 동원하여 왕건의 군대를 도와 견훤의 군대와 싸우도록 명령했다.

 

이 전쟁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들은 크게 패하고 항복하였다. 그러자 견훤은 앙심은 품고 왕신의 시체를 왕건에게 보내었고 왕신의 시체를 본 왕건(王建)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충남 홍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 성주(城主)인 긍준을 참수했다. 하지만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자 왕건은 장군 영창과 능식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강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강주는 왕봉규란 인물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왕봉규는 왕건과 견훤 양 다리를 걸치고 어느 쪽으로 붙어야 유리한지 지조 없이 눈치만 보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 왕봉규는 의령의 성주였으나 세력을 확대하여 강주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또한 신라왕으로부터 권지강주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왕건은 그런 왕봉규가 견훤과 결탁되어 무기와 군사자금을 대주면서 뒷거래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강주를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창과 능식의 군대는 강주 함락에 실패했고 그 주변 지역인 전이산(경남 김해). 노포령. 서산. 돌산(전남 순천)등의 지역을 함락시키고 그 곳 장수들을 포로로 잡는 승과만 올렸다. 이 때 왕건은 직접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옹주성(공주)을 공격하였고 장수 재충과 김략 등에게도 군사를 주어 은밀히 대야성(합천)을 기습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야성은 견훤이 20년동안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얻은 후백제의 전략기지였다. 이런 대야성을 기습한 왕건의 군사는 성()을 함락하고 성주 추허조와 30여 명의 장수들을 포로로 잡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이 때가 9277월이었다.

 

대야성(합천)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고 왕건은 직접 강주 순향 길에 나섰다. 대야성이 무저진 마당에 강주의 왕봉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강주를 접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해 8월에 강주에 도착한 왕건(王建)은 강주를 순행하고 무혈로 접수하였다. 강주가 왕건(王建)에게 접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백제의 장수 홍달이 왕건에게 귀순하는 등 후백제의 성주들이 대거 왕건에게 귀순했다. 왕건에게 패한 견훤은 신라가 측면에서 군사를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 사실 신라의 경애왕은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마다 왕건의 편을 들었고 심지어는 왕건을 자극하여 견훤을 치도록 했다. 이러한 신라의 왕건 지원은 비록 신라의 군사력이 쇠퇴해 있다고는 해도 견훤(甄萱)이 왕건(王建)과 싸우는 마당에 왕건의 편을 든다는 것은 견훤으로서는 여간 속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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