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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연재소설 - 제7의 왕국 제1부 (18회)




권우상 연재소설 = 7의 왕국 제1(18)

 

7의 왕국

 

 

견훤(甄萱)은 사벌주(상주) 가은현 사람이며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년(867)에 태어났는데 본래의 성은 이씨였고 뒤에 견()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고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벌주(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신라 진흥왕의 왕비 사도의 시호는 백승부인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은 파진간 선품이고 선품의 아들 각간 벼슬의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삼아 각간 원선을 낳았는데 이 분이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남원부인이고, 그들에게서 아들 다섯, 딸 하나를 얻었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이고 둘째 아들이 능애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요, 넷째 아들이 보개요, 다섯째 아들이 소개요, 맏딸이 대주 도금이다.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는 신라 신하 진흥왕의 왕비 혈통이지만 진흥왕의 자손이 아니라 진흥왕이 죽고난 뒤에 백승부인이 이씨에게 재가하여 낳은 셋째 아들 구륜공의 후손이다. 하지만 구륜공의 후손은 몰락하여 귀족 신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농부로 살았다.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가 사벌주(상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것도 귀족 신분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견훤(甄萱)은 성장하여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경도(서라벌)에 들어 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잠을 잘 때에도 늘 창을 머리에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 보다 앞장 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비장(裨將)으로 지내던 견훤(甄萱)은 아버지인 아자개가 사벌주(상주)를 장악하고 군벌을 형성하자 사벌주(상주)로 돌아와 한동안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얼마 후 신라 도성(서라벌) 주변에서 많은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아자재보다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890년에는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전남 광주)로 내려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신라 서면 도통 지후 병마 제치 지철 도독 전무공 등 주군 사행 전주 자사 겸 어사 중숭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호>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892년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살이었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싸움에 신라 조정은 마땅한 대책은 커녕 강 건너 불을 보듯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라는 이미 이들을 제압할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지방 성주(城主)들에게 함부로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지키라는 수성전을 명령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성전은 커녕 날이 갈수록 신라의 성주들 중에는 궁예 쪽이나 견훤 쪽으로 투항하는 성주들이 늘어나고 있어 신라 조정에서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날이 갈수록 견훤(甄萱)은 일선(경북 선산)까지 밀고 들어와 세력을 확대하여 주변의 10여 성을 모조리 집어 집어 삼키자 신라 조정의 대신들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우왕좌왕하면서 국정 수행에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패망할지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견훤(甄萱)이 세력 확대에 열을 올리자 궁예(弓裔)도 그냥 있을 수 없다는듯 세력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궁예는 직접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아자개(견훤의 아버지)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사벌주(상주)와 안동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왕건은 5천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견훤의 영토인 진도와 고이도를 치기 위해 군사를 송악 해안가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궁예가 사벌주(상주)와 안동 일대를 점령하면서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 견훤의 군사들과 전투를 벌리자 신라의 경도(서라벌) 주변은 견훤의 군사와 궁예의 군사들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궁예가 서라벌 주변에서 견훤의 군사들과 전쟁을 하는 사이 수군대장으로 임명된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5천의 수군(水軍)1백척의 병선에 나누어 태우고 나주를 향해 출전했다. 그러나 이 때 견훤은 신라를 치기 위해 서라벌로 향하고 있었고 먼저 대야성(합천)을 공격했으나 신라 장수들이 맹활약으로 대야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열흘동안이나 혈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 때 왕건(王建)이 나주를 치기 위해 출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甄萱)은 대야성(합천) 공격을 포기한 채 급히 나주로 향했다.

 

그러나 견훤(甄萱)이 나주에 도착하기 전에 왕건(王建)은 이미 나주를 쳐서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주변 해상까지 완전히 장악하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이 때가 909년이었고 견훤(甄萱)은 왕건에게 빼앗긴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왕건의 군사와 총력전을 펄쳐 나주를 맹렬히공격하였고, 열 이틀동안 나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건이 이끄는 수군(水軍)의 기습을 받아 견훤의 군사는 크게 패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견훤은 많은 군사를 잃고 결국 왕건(王建)이 장악한 나주를 포기한 채 울분을 삼키며 완산주로 돌아 갔다.

 

그리고 당분간 신라 공격의 계획도 보류되었다. 왕건의 수군(水軍)이 나주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때까지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개의 주()와 현()이 궁예에게 투항했다. 910년 견훤은 나주 수복전에 나섰다. 이 때 왕건은 철원에 머물고 있었고 견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주의 궁예 군사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견훤이 3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나주성을 급습하여 포위하자 나주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다. 나주 앞바다를 견훤의 수군(水軍)이 장악하는 바람에 나주와 송악(개성)간의 뱃길이 끊길 정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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