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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연재소설 = 제7의 왕국 제1부 (17회)



권우상 연재소설 = 7의 왕국 제1(17)

 

7의 왕국

 

    

그러자 까치 한 마리가 깡둥깡둥 소나무 가지를 이리저리 건너 뛰며 고개를 까우둥거리면서 궁예를 반갑게 얼러대는 듯 하다가 이내 날개를 펴서 풀삭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궁예(弓裔)는 잠간 쉬어 가고 싶은 생각이 나서 바위에 걸터 앉아 쉬고 있는데 별안간 깍깍울면서 하늘에서 깃을 쳐 나는 까치소리가 들렸다. 궁예는 얼른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쳐다보니 조금전에 반갑게 지저귀던 까치가 주둥이에 무엇인가 가로로 물고 날아들다가 궁예가 들고 앉아 있는 바리때 안에 툭 떨어뜨렸다. 궁예는 무심코 바리때 안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고 보니 놀랍게도 아첨(牙籤)이었다. 아첨은 점을 치는 산통속에 있는 점대인 것이다.

 

 

 

허어. 이놈의 까치가 어디서 장님이 점()을 치는 점대를 물고 와서 남의 바리때 속에 떨어뜨렸구나. 허참 오늘 재수 없겠다!”

궁예(弓裔)는 자기도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면서 눈먼 장님은 재수가 없다고 했다. 바리때 안에서 점대를 끄집어 내어 홱 집어 던져 버릴려다가 문득 보니 글자가 보였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글자를 보니 임금 왕()자가 뚜렸이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궁예는 외눈알이 번쩍하고 트였다.

허허..이거 임금 왕자구나!”

내가 임금이 된다는 뜻인가?”

억조창생을 도탄에서 구해 내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된다구...”

까치가 점대를 물어다 주어 내가 임금이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로구나!”

 

 

 

까치는 길조(吉鳥)라구 해서 예로부터 벼슬을 하려면 까치가 대문 맞은편 나무에 앉아 운다고 하더니...”

궁예(弓裔)는 얼른 스승인 범교 대사한테 달려가 먹장삼을 헤치고 허리춤에 매단 노랑 엽낭속에서 까치가 떨어뜨린 점대를 꺼내어 받쳤다. 범교대사(梵橋大師)는 점대를 보자 눈을 휘둥거리며 깜짝 놀랐다.

이것이 임금 왕()자 아니냐?”

그러합니다

 

 

 

허허. 하늘이 너의 앞 길을 축복해서 너한테 예시(豫示)를 주신 것이다! 너는 장차 왕이 될 몸이 틀림 없다! 천기를 누설하지 말거라

궁예(弓裔)는 까치를 통해서 점괘(占卦)를 얻은 후부터 더욱 용기가 솟아나 새벽이면 먼동이 트기전에 일어나 불공을 드리고 해가 뜨면 백연산 깊숙이 들어가 창과 칼을 쓰고 활을 쏘고 검무를 추며 무예를 닦으며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장군으로써의 자질과 역량을 키웠다. 매일 새벽이면 산에 올라가 웃옷을 벗고 검무를 추는 등 무예를 닦기를 십여 년이 되었다.

 

 

궁예(弓裔)는 스물 한 살이 되자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속세에 나와 신라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 때가 891년 신라 진성왕 5년이었다. 무예가 출중한 궁예는 양길이 이끄는 반란군 휘하에서 기마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다니는 장수로 활약했다. 궁예는 반란군에 가담한 후 죽주(안성)의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훤과는 성격이 맞지 않아 기훤 밑에 있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함께 다시 양길 밑으로 들어 갔다. 양길의 밑에서 막강한 군권(軍權)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자 양길의 휘하에 있는 장수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열중했고, 급기야 궁예(弓裔)는 충주 괴산의 세력을 한 손에 거머쥐는 세력가로 부상했다.

궁예(弓裔)는 양길 밑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894년에는 휘하에 4천여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는 장군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 때부터 궁예(弓裔)는 부하들을 14개 대오(隊伍)로 편성하고 기마대(騎馬隊)와 궁술대(弓術隊) 그리고 창검대(槍劍隊)를 별도로 조직 운영하면서 새로운 전술과 전법을 개발했다. 이때 궁예(弓裔)의 휘하에는 김대검. 모훈, 장귀평, 장일, 유호 등 다섯 부장(副將)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후 궁예의 세력은 성장을 지속하면서 강원도 북부 일대와 경기지역을 모두 장악했고, 896년에는 송악(개성)의 호족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을 신하로 맞아 들이었다. 그리고 898년에는 패서도(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와 한산주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군에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기반을 갖추었다. 궁예가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우려 하자 양길은 청주, 충주, 괴산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힘을 합쳐 5천의 군사로 궁예를 공격해 왔고 궁예는 이들과 맞서 싸웠다.

이 전쟁에서 궁예는 양길의 군사에게 위기에 몰렸으나 왕건(王建)이 군사를 이끌고 와 양길의 군사들을 격파하자 궁예는 위기에서 벗어났고 양길은 크게 패하여 도주했다. 그러자 궁예(弓裔)는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으나 그후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신라(新羅)의 국토는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의 삼국으로 분할되었고 신라는 점점 국력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군대와 싸울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자 국력이 허약한 신라를 옆에 두고 견훤과 궁예는 후백제와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내걸고 서로간에 패권(覇權)을 다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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