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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 천.지.인.명(天地人命) 제3부 열 두 번째 (12)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제3부 열 두 번째회 (12)

 

     천. . .

 

 

이듬해인 서기 6453, 마침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잘 훈련된 정예병 10만 명과 돌궐(突厥)과 거란군 5만을 합쳐 15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자 백제의 의자왕은 5월에 신라에게 빼앗겼던 7개 성을 공략하여 되찾았고 신라에서는 김유신을 보내 백제에 대한 총공세를 가해 왔다.

 


그 무렵 고구려를 침입한 당나라의 군대는 비사성과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을 장악했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대패하여 10월의 추운 겨울 바람을 안고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본국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돌아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보복을 다짐했고 또 한번의 고구려와의 대대적인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던 서기 64710월에 백제 의자왕은 장군 의직에게 5천의 보병과 기마병 3천을 주어 신라의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의직은 다시 신라의 서부 변경 요차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다시 10개 성을 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지난 날 신라의 김유신에게 당한 불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4월에 옥문곡에서 다시 신라의 김유신과 싸우다가 또 한번 패배의 아픔을 맛보았다.

그 때 고구려에서도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장군 설만철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장군 설만철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두 달 동안 격렬하게 싸웠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밀고 밀고 당기는 공방전만 계속하고 있었다. 이 소문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귀에 들어가자 이세민은 노발대발하며

“ 3만의 군사로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다니 도대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하는거야 ! ”




그러자 옆에 있는 신하 한 사람이

연개소문은 워낙 지혜롭고 전략과 전술이 탁월한 장군이라 우리 당나라 군사들은 공격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공격에 한계를 ? 이런 빌어먹을.... 좋아 그렇다면 30만 병력으로 다시 고구려를 치도록 준비하라 ! ”

. 폐하 그리 하겠습니다

()나라 태종 이세민은 3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자 병력을 증가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명령했고, 이세민은 3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재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기 6474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갑작스런 병으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신라(新羅)는 또 당나라에 김춘추의 맏아들 범민(후에 문무왕)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 침략을 일삼고 있다면서 당나라가 중재하여 전쟁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나라 고종은 백제에 조서를 보내 신라에게 뺏은 땅과 포로를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를 지원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백제를 돕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또한 고구려가 당나라의 말을 듣지 않으면 거란과 모든 변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라 고종의 강력한 경고에 백제 의자왕은 일단 한 발 물러섰다. 그래서 서기 652년에 당나라 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당나라를 달래고 한편으로는 서기 653년에 왜국(倭國)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고구려와 긴밀한 우호관계도 유지하였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구성할 경우를 대비한 의자왕의 치밀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좌평(벼슬) 성충의 건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의자왕은 서기 655년 정월에 고구려, 말갈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23개 성()을 무너뜨렸다. 당황한 신라의 무열왕(김춘추)은 급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는 그해 2월에 장군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고, 고구려는 당나라군을 맞아 석달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당나라군은 결국 고구려군에게 패하여 5월에 돌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百濟)8월에 고구려와 말갈의 지원을 받으며 신라를 공격하여 다시 신라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이로써 신라(新羅)는 졸지에 30여 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백제의 의자왕은 자만해져서 음란과 향락에 빠졌고 임자(林字)와 같은 간신(奸臣)들을 가까이 하며 늘 궁녀들과 어울려 지내며 정사를 등한시 하고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더구나 의자왕의 명령에 따라 전국에서 15살에서 17살 사이의 예쁜 궁녀들을 선발하여 32백 명으로 늘어나자 이 궁녀(宮女)들을 먹이고 입히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았다 궁녀의 수가 32백명으로 늘어나고 여기에 들어가는 한 해 예산이 적지 않자 좌평(벼슬) 성충은 의자왕에 이렇게 말했다.

궁녀의 수가 32백 명으로 늘어난 것은 과다한 줄로 압니다. 지금은 비록 전쟁을 하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신라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릅니다. 그러하오니 소신은 궁녀의 수를 줄이는 대신 군사의 수를 늘이는 것이 국가의 안보에 도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이 말을 들은 의자왕은 성충에게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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