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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 천.지.인.명(天地人命) 제3부 열 한 번째 (11)




권우상(權禹相) 연작소설 제3부 열 한 번째회 (11)

 

       천. . .

 

무왕(武王)의 뒤를 이어 백제(百濟) 31대 왕으로 등극한 의자왕의 이름은 융()이며 무왕의 맏아들이었다. 서기 632년인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서기 6413월에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의자왕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고 41명의 서자(庶子)를 두었다. 의자왕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중국의 현인증자(曾子)와 같다고 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었다. 그러나 해동증자라는 별칭과는 달리 그는 매우 야심차고 공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 탓으로 즉위한지 5개월 뒤인 7월에 의자왕은 직접 2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신라(新羅)를 공격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공격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또한 그로부터 한 달 후인 8월에는 장군 윤충(尹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고 신라(新羅)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은 백제에서 신라의 경도 서라벌로 가는 길목으로 아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라 신라의 김춘추는 자신의 사위인 김품석에게 이 곳을 맡겼으며 김품석이 향락에 빠져 민심을 잃자 의자왕은 이 틈을 노려 기습을 감행하고 김품석을 생포했다. 백제의 장수 윤충은 항복한 신라의 김춘추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처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서쪽지방 주현에 분산하여 살게 하고 군사를 그 곳에 배치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대야성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윤충을 불러 치하했다.

참으로 장군의 공이 컸소이다 ! 이제 신라는 우리 백제가 어떤 나라인지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오. 다시 한번 장군의 노고를 치하 하오 ! ”

오늘의 이 전과가 어찌 소장의 공이라 하오리까. 이는 국왕 폐하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이루어진 일이옵니다

자고로 전쟁이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오. 이번 신라와의 전쟁에서도 아마 장군은 목숨을 내놓고 싸웠을 것이니 어찌 그에 대한 보답이 없을 수 있겠소. 해서 그대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상으로 내리겠소 ! ”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 ”

의자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윤충을 위해 조정 신하들을 모두 불러 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한편 신라의 선덕왕은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한 보복전을 가하기 위해서 고구려에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옛 땅인 죽령 서북 지역을 돌려주면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김춘추는 화를 내며 거절했고,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별관(別館) 가두어 버렸다. 군사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다가 되레 포로 신세가 된 김춘추는 갇힌 몸으로 혼자 지내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김춘추는 자신을 감시하는 군사에게 말했다.

 

 

 

연개소문을 만나도록 해 주시오

김춘추는 다시 연개소문과 대면한 자리에서 연개소문의 요구대로 고구려의 옛 땅인 죽령 서북 지역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거짓으로 연개소문의 요구를 들어 주겠다고 말하고 풀려난 뒤 접경지역에 와 있던 김유신의 결사대 1만 명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의 선덕왕은 무사히 귀국한 김춘추의 손을 잡고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잠시나마 폐하에게 심려를 끼쳐드려서 황공하오이다. 지금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저에게 속은 줄 알고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이를 갈아봤자 이미 돌아왔는데 어찌 하겠소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우리 신라를 침략할 것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리다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관계가 악화된 것을 기회로 백제(百濟) 의자왕은 고구려 보장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화친을 제의하자 고구려가 이에 응하였다. 이 때가 서기 64311월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의도는 신라가 당()나라로 갈 때 사용하던 항구인 당항성(당진)을 뺏기 위해서였다.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이 성립되자 1만 명의 정예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다시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영토를 유린하였다. 그러자 신라의 선덕왕은 위기감을 느끼고 당나라에 급히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첩보를 입수한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의 개입으로 전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점령하고 있던 신라의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그리고 의자왕은 곧 당()나라를 달래기 위해 이듬해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사농성, 상리, 현장 등 사신(使臣)을 고구려와 백제에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백제 의자왕은 일단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표를 올려 전쟁을 재개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전에는 신라 공격을 멈출 수 없다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때문에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결국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를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자연히 신라와 백제 사이에도 전쟁 기운이 돌았고 결국 그해 9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은 백제를 선제 공격하여 7개의 성을 빼앗음으로써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중재로 잠시나마 유지되었던 화해 분위기는 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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