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권우상(權禹相) 칼럼 - 人輸之王 不可政治

 

칼럼

 

                     人輸之王 不可政治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기원전 202, 초가을 청명한 어느 날 한왕(漢王) 유방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성고에서 출진하였다. 한신이 대군을 총지휘 하고 진하, 공희 등 장수들이 선봉에 섰다. 기치와 창칼이 수백리길을 뒤덮었다. 유방은 평소에도 늘 백성들을 어루만지면서 적지에서 점령한 성안의 백성들에게 털끝만치도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은 늘 유방 편에 있었다. 반면 초왕(楚王) 항우는 언제나 적지의 백성들을 죽였다. 신하들이 죄없는 백성들을 죽여선 안된다고 간언했지만 항우는 적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점령지 백성을 참살했다. 그래서 유방은 덕성으로 나라를 다스리지만, 항우는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백성들은 생각했다. 진나라 말기에 유방과 항우가 의병을 모울 때 유방은 항우에게 덕으로 백성의 다스려야지 힘으로는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항우는 유방이 힘이 약해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념이 다른 두 사람은 한()과 초()로 나누어졌다.

 

 

유방이 대군을 일으키자 항우도 팔십만 대군으로 팽성을 출발했다. 이때 태풍이 일어나 중군의 깃대가 부러지고 옥루교를 건널 때에는 항우가 탄 오추마가 길게 울어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항우 옆을 따르던 주란이 진군을 멈추자고 했지만 항우는 거절했다. 이때 한신이 이끌고 있는 한나라 군사가 성고로 회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항우는 이때다 싶어 대군을 휘몰아쳐 한신의 군대를 맹추적 했다. 하지만 구리산에서 한신의 복병을 만나 항우는 많은 군사를 잃었고, 항우 자신도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계포와 종리매가 항우를 구원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좌충우돌 하면서 겨우 탈출했다. 항우가 남은 군사를 점검해 보니 팔천명 뿐이었다.

 

 

이런 병력으로 한()의 백만 대군과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항우는 포위되자 성문을 굳게 닫은 채 근심에만 쌓여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어 싸우자고 하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유방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 하자는 신하도 있었다. 하지만 팔천명으로 백만 대군을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한 일이었다. 더구나 남은 팔천명도 오랫동안 전쟁에서 시달려 온 터이라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이때 갑자기 하늘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퉁소 소리가 한 곡조 길게 바람결을 타고 들려 오자,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다 귀를 귀울이고 들었다.

 

 

구월 단풍 깊은 가을 서릿바람 불어 오고, 하늘 높고 물 맑은데 외기러기 울고 간다. 칼을 짚고 땅에 서서 집 떠난지 십년일세. 어머님은 안녕하고 마누라는 무고하며, 사래 긴 밭 누가 갈며 이웃집의 익은 술은 그 뉘라서 마시는가. 사립문에 나와 서신 백발 노인 저 모습은 우리 조부 분명하구나. 인생이 무엇이기에 부모처자 내버리고 고향 산천 등지고서 죽을 땅을 헤메느뇨. 가슴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하니 부질없는 이 싸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어화 천하 동지들아, 한왕은 유덕하여 항복하는 군사는 살려준다. 너희들은 들어보라. 양식은 떨어지고 진영은 비었는데 나희들만 남아있어 빈 진영만 지킨들 무엇하랴. 미구에 깨어지고 옥석이 구분할제 그때엔 어이하리. 슬프구나 슬프구나 추운 서릿바람은 불어 오는데 초패왕은 망했구나.”

 

 

바람결에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초나라 군사들의 가슴에 눈물로 다가왔다. 더구나 달빛이 밝고 싸늘하며 쌀쌀한 바람은 풀속을 헤치고 들어왔다. 종리매가 깊이 잠들어 있는 항우를 깨워 군사들이 뿔뿔이 달아났다고 보고한 때는 이미 삼경이 지났다. 남은 군사들은 스무명 뿐이었다. 항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찌할 것인가? 군졸은 모두 달아났고, 진영은 텅 비었고 백만 적군은 포위하고 있고...어찌하여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만 들린단 말인가(四面楚歌란 말은 여기서 나옴)?’ 항우는 눈물을 비오듯 쏟아냈다. “! 하늘이시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수하 장졸들은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으니 혼자 무엇을 한단 말인가?” 싸우다가 몸에 상처를 입은 항우는 길게 탄식하고는 칼로 제 목을 스스로 찔러 죽자 초나라는 망했다. 때는 대한(大漢) 5년 기해(己亥) 12월 겨울이었고 나이는 32세였다.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다. ‘人輸之王 不可政治(엔슈즈왕 뿌커센찌)’ 즉 백성을 잃은 왕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백성을 잃었으니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