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권우상(權禹相) 칼럼 - '문고리' 3인방과 십상시

칼럼

 

 

                  ‘문고리’ 3인방과 십상시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하려면 3명 중 한명을 거쳐야한다는 뜻에서 '문고리'라는 말이 나왔다.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은 최순실 의혹에서 나온 3명이 있는데 정호성 제1부속 비서관,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이다. 많은 분들은 이 문고리 3인방이라는 통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것이다.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하는 권력의 핵심인물을 말한다. 3인방과 함께 안종범 수석, 우병우 수석 등을 포함해 야당의 한 국회회원은 이들을 십상시라고 했다. 그런데 최순실 의혹이 사실로 들어나면서 청와대 문고리 3인방과 함께 우병,우 안종범은 현재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으니 아마 이들에게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십상시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이 말은 중국 후한시대에서 나온 말인데 그후 권력의 핵심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후한시대에 일어난 권력 투쟁에서 가장 큰 싸움은 여섯 번 째로 일어난 황제(영제)의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었다. 이때 군권을 쥔 대장군은 동탁이었고, 조조는 동탁의 수하에 있었다. 조정의 권신들과 결탁해 큰 벼슬을 맡게 된 동탁은 서주(西州)20만 군사를 거느리면서 유약한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서주는 흔히 서랑(西凉)이라고도 하는데 중원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부르는 양주(凉州)는 한인(漢人)들과 유목생활를 하는 강인(羌人)들이 뒤섞여 살아 싸움이 쉴새 없었다. 오랫동안 싸움을 겪지 못한 중원의 군사들과는 달리 천하에서 가장 강한 군사들이 모였고, 동탁은 수십년동안 강인들과 싸우면서 여러 민족의 군사를 거느리는 비결을 나름대로 터득한바 있었다. 해서 동탁은 황제의 나이가 어린 기회를 틈타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동탁은 사위인 중랑장 우보(牛輔)에게 근거지인 협서(陜西) 땅을 지키게 하고 동탁 자신은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이끌러 낙양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조정의 권력 실세인 하진은 동탁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탁의 누이동생이 동태후였기 때문에 조정을 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진은 황제를 모시는 환관들의 말대로 수하 장군들을 궁궐 밖에 대기해 놓고 혼자 궁궐에 들어갔다가 참살당했다. 궁궐 밖에서 기다리던 원술, 원소 등은 하진의 참살을 알고 궁궐로 쳐들어가 환관들을 모조리 죽였다. 조정의 세력을 제압한 동탁은 황제를 폐하는 일에 착수하고 자기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정의 권력 실세들을 모조리 죽여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진류왕) 영입을 시도하였다. 이 반란은 십상시가 왕권을 틀어쥐고 인사권까지 행사하면서 매관매직 등 부패가 심해 일어난 것이다. 십상시란 12명의 권력실세들을 말하는데 후한서 68권 장양전에 따르면 십상시의 실존 인물은 12명으로 장양, 조충, 하운, 곽승, 단규, 손장, 필랑, 율승, 고망, 장승, 한이, 송전 등이다.

 

 

 

그런데 왜 십상시라고 했을까? 그것은 당시 낭중 장균이 황제(영제)에게 올린 글에서 부르기 편하도록 당시 권력을 잡았던 중상시 열 두 사람을 가리켜 십상시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가 반드시 10을 가리키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진의 제거는 후한시대에 일어난 여섯 번째 일어난 외척과 환관의 싸움에서 죽은 환관이 가장 많은 2천여 명으로 말 그대로 대학살이었다. 수염이 나지 않은 남자들 가운데 살기 위해 거세를 안한 것처럼 부라부라 아랫도리를 드러내 보여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니 너무나 비참한 상황이었다. 권력 실세의 대명사인 십상시란 말은 명나라 시대에도 환관들의 횡포가 극심하여 이들은 십상시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지금도 십상시는 권력 실세들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십상시(189)의 대학살을 시작으로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외척과 환관도 무력해 지면서 창칼을 가진자, 힘이 센 자들이 세상을 주무리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이 때가 바로 위()의 조조, ()의 유비, ()의 손권이 패권을 다투는 삼국시대다. 고려 공민왕 후기 6년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다가 참살당한 신돈의 경우도 권력 탐욕의 한 사례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