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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미실을 떠올리게 하는 순실

칼럼

 

 

                    미실을 떠올리게 하는 순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요즘 최순실이라는 여자가 대한민국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파만파로 확산되면서 온 국민의 분노가 터져 나라가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이는 한 여자가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신라의 박미실을 떠올리게 한다. 신라 진흥왕 중반기에서 진지왕을 거쳐 진평왕 초기까지 약 40년간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군권까지 잡았던 여자는 박미실(朴美室)이다. 박미실은 제2세 풍월주 박미진부의 딸이다. 미진부의 부친은 아시공이며 어머니는 법흥왕과 소지왕 두 왕의 후궁인 벽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상엽궁주다. 법흥왕은 정비에게는 아들이 없어 후비 옥진궁주에게서 아들 비대를 얻었고, 그는 비대에게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지만 법흥왕의 정비 소생의 딸 지소부인은 비대의 어머니 옥진이 골품이 없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한다고 반대했다. 아시공과 상엽궁주가 지소부인을 지지하고, 옥진의 아버지 위화랑이 또한 지소부인을 지지함으로써 비대의 왕위 계승은 실패했다. 그 대신 지소부인과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사이에서 상맥종이 태어나 왕위에 올랐다. 이 분이 진흥왕이다. 진흥왕이 7살에 즉위하자 지소부인이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진흥왕의 즉위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아시공과 삼엽궁주다. 또한 그들 사이에 태어난 미진부 역시 16세의 나이로 태후의 폐신(총애하는 신하)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박미실이 처음 만난 남자는 세종이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박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지소태후는 세종이 성장하자 미녀를 뽑아 궁중에 모아두고 세종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선택하라고 하자 세종은 박미실을 선택했다. 이때 박미실은 권력에 야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소태후는 박미실을 꺼려했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명령으로 박영실을 계부로 삼았는데, 지소태후는 박영실을 싫어했다. 태자가 없던 법흥왕은 원래 박영실을 지소태후의 부군으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지소태후는 박미실이 박영실과 인척관계라 박영실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사부의 권유로 박미실을 세종의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지소태후는 자신과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숙명을 진흥왕의 욍비로 삼고 정비 사도부인 박씨를 추방하려 했다. 사도부인 또한 박영실의 딸이어서 사도부인과 박미실은 인척관계라 지소태후는 사도부인에 대한 미움을 박미실에까지 연계하여 박미실은 궁궐에서 추방됐다.

 

 

 

추방된 박미실은 화랑인 사다함과의 사랑에 빠졌고, 세종은 융명과 결혼했으나 늘 박미실만을 동경했다. 이때 박미실은 사다함과 결혼을 약혼했지만 사다함은 백제와의 전쟁에 나갔고, 그 사이 세종은 박미실을 첩으로 맞이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박미실이 세종의 첩이 된 것을 알고 자살했다. 사다함이 죽자 박미실은 권력에 대한 탐욕에 빠졌다. 더 이상 순정 같은 것은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색정과 권력욕 뿐이었다. 박미실은 진흥왕의 태자 동륜과 간통하고 임신을 하면서 권력의 핵심 인물로 다가섰다. 그녀는 색스에 능하고 음악과 춤에도 뛰어나 진흥왕은 그녀에게 쉽게 빠져 들었다. 덕분에 박미실은 왕비에 머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박미실이 이렇게 된 데에는 배후에 사도왕비가 있었다. 박미실은 진흥왕을 움직여 풍월주를 없애고 폐지된 원화를 복원하여 박미실이 원화가 되었다. 이는 박미실이 화랑도를 원격 조정하여 군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화랑도는 최대의 군대조직이며 인재양성기관이었기에 박미실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장악한 것이다. 왕권을 잡은 박미실과 사도부인은 진흥왕이 중풍으로 눕자 조정의 권력은 두 여자에게 넘어갔다. 이 과정에게 박미실은 중신들에게 성()을 상납하여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여 들였다. 왕권이 박미실에 의해 좌우되면서 뇌물과 인사청탁으로 국가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고, 관료들의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게다가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은 모조리 숙청되고 아첨하는 간신들만 조정에 덕실거렸다. 급기야 문노를 주축으로 한 화랑도가 창칼을 들고 일어나 박미실을 체포하여 가두고, 진평왕을 폐위하여

새 왕을 추대했다. 이분이 덕만 공주인 선덕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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