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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權禹相) 역사소설 - 남이 장군 제1회 (1)

 

권우상(權禹相) 역사소설 - 남이(南怡) 장군 제1(1)

 

 

      남이(南怡) 장군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도 여진족의 내습이 그치지 않자 1425(세종 7)경부터 조정에서는 경원부를 다시 용성(龍城: 지금의 수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논이 강력하게 일어났지만 조종(祖宗)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고 하는 세종대왕의 적극적인 북진정책으로, 드디어 1432년에는 석막(지금의 회령)에 영북진을 설치해 동북경의 개척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1433년 우디거족이 알목하(斡木河 : 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建州左衛都督) 동맹가티무르(童猛哥帖木兒)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여진족 내분의 기회를 포착하여 김종서에게 여진족 토벌을 명령하자 김종서는 쾌히 승낙했다.

김종서는 16살이 되던 해인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에는 상서원 직장을 지냈으며 태종실록편찬을 주관한 이후 광주판관. 이조정랑 등을 지낸 인물이었다.

 

 

세종대왕은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김종서에게 함길도 도관찰사로 임명하여 여진족 토벌을 지시했다. 이 때가 세종대왕 15(1443)이었다. 김종서는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두만강을 향해 진군했다. 총지휘관인 김종서는 군사를 각각 10만씩 좌우 양 군영으로 나누고 좌군 지휘관에는 이징옥 장군, 우군 지휘관에는 남이 장군이 맡았다. 양 군영의 군사들은 대부분 기마병이었다.

 

 

 

때는 6월이라 폭우가 쏟아져 두만강은 강폭이 좁고 물살이 세서 나무와 돌이 모두 흘러내려 탁류가 범람하고 있었다. 이렇듯 홍수가 대단해서 전부터 배를 댔던 나루터가 없어지고 모래섬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노를 젓는 뱃사공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 날 상황이었다. 이때 좌군(左軍)을 이끌고 있는 이징옥 장군은 회령을 향해 밤낮으로 진군했고, 우군(右軍)을 이끌고 있는 남이 장군은 부령, 경흥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좌군(左軍)의 선봉에 있던 김종서 장군은 옆을 돌아보며 이징옥 장군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자 이징옥은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비가 오기전에 오늘은 두만강을 건너야 할 듯 합니다.”

 

 

 

그대로 시행하라는 김종서 장군의 명령은 지체없이 내려지고 그 날에 도강(渡江) 하기로 결정되었다. 배는 100여 척으로 한강의 나룻배와 다름이 없고, 그에 비하여 약간 큰 편이었다. 여러 배에는 장수들과 말과 군졸들이 탔다. 배에 다 오르고 나자, 사공이 삿대를 들어 한 번 물 밑을 쿡 찌르자, 워낙 물살이 빨라 배따라기 소리를 맞추어 가며 배가 둥실둥실 떠서 쏜살같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 김종서가 수역(首譯)을 바라보면서

자네 길을 알겠는가?”

하고 물었다.

 

 

수역은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길이란 별 것이 아닐세. 저쪽 언덕에 있네.”, 저 앞에 있는 언덕 말씀이옵니까?”

그런 말이 아닐세. 이 강은 저 여진족과 우리 조선과의 경계선으로 언덕이 없으면 모두 물 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만물의 법칙이란 것이 모두 저 물가와 같다. 그러니 길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곧 그 물가에 있는 줄 알면 그만이 아닌가?”

장군! 저는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수역이 말하자, 김종서 장군은

 

 

조선에서 길을 아는 이는 오직 자네 한 사람뿐인가 아닌가.”

어느새 배는 두만강 건너편 강기슭에 닿았지만 갈대 숲이 무성해서 땅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두 배에서 말과 병참 물품을 내려 갈대를 꺾어버리고 배 위에서 멍석을 걷어다가 거기에 깔려고 서둘었으나 갈대 뿌리가 송곳처럼 뾰죽뽀죽 날카롭게 솟아 있고 온통 진흙 벌판이어서 깔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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