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칼럼 = 집단의 이익을 배제, 진실의 편에 서야

  • 등록 2024.09.27 08: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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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집단의 이익을 배제, 진실의 편에 서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우리에게 일생동안 필요한 재산의 한도는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무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능력을 초월하여 그 무량을 긁어 모으려고 하는 사람, 도둑질을 하는 사람, 사기꾼 노릇을 하는 사람 등 각가지 방법으로 재산 모으기에 혈안이다. 그러나 막상 깊이 살펴보면 하루 세끼 쌀밥을 걱정없이 먹을 수 있으면 그것이 최대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현실적으로 빈궁한 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육신과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빈궁을 탈피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대자연의 하나이며, 대자연과 격리될 수 없는 깊은 유대관계에서 살아간다. 지나친 자기 위주의 재물 축적은 다른 사람에게 가야할 몫을 갈취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상관 관계의 연계성이 있음을 절감하는 사람이 철학하며, 사색하는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최소한의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 속에 순수한 양심을 살찌우는 것이라고 자인하고 이를 신앙하는 사람만이 현대를 올바르게 살게 될 것이다. 행복만 수용하려고 하면 욕심이 싹트게 되니 행복을 가지려는 생각 앞에 지혜도 함께 생겨나도록 자기를 밝혀야 한다. 행복과 지혜를 골고루 갖추게 되면 물질적으로만 행복해야 한다는 욕망도 고쳐 복을 나누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지혜는 복을 다스리는 광명인 것이다. 복도 태양의 무한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한다. ‘흑과 백으로 나눠어진 세상사람(世人黑白分)-오가면서 영광과 모욕을 다투네(往來爭榮辱)- 영광 얻은 자 편안해지고’(榮者自安安)-모욕당한 자는 녹록해지는법-(辱者定碌碌)-남양에는 숨어사는 이가 있으니(南陽有隱居)-베개 높이하고 실컷 잠을 자누나’(高眼臥不足)’ 이 노래는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서로 패권을 놓고 싸우면서 세상이 어지럽자 산속에 숨어 살던 제갈량이 지어 백성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다.

 

이 노래를 듣고 유비는 제갈량을 모사로 추대하자, 제갈량은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어 유비는 촉왕이 되었다. 지금 한국은 북핵 위협에 나라가 위기에 놓여 있는데도 좌우(흑백. 양극화)이념 대립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에는 즐거운 것도 있고 눈물나는 고통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눈물과 고통의 우물에서는 금쪽 같은 지식이 분출한다. 경험만큼 확실한 지식은 없다. 삶속에서 풍부하고 진솔하게 축적된 경험은 책 등을 통해서 얻은 단순한 지식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경험에 의한 지식은 오류의 확률이 거의 없으므로 그만큼 확실성을 갖는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경험을 통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라 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하기도 한다.

 

그런데 경험이라는 것은 동시 다발적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의 나이테가 많을수록 많은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마치 긴 세월 눈보라를 맞고 성장한 나무에는 나이테의 축적이 많은 것과 같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 지켜야 할 ‘룰’이 없고 최하의 도덕이나 양심도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 일이라면 불물을 가리고 않고 설친다. 죄에는 법에 저촉되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일들이 수두룩하게 마치 가을의 낙엽처럼 쌓여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개개인의 양심이 청결하고 반듯하지 않으면 아무리 법으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해도 인정 넘치는 사회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의 도덕성도 올바르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명심보감에 오직 바른 것을 지켜라(惟正可守)라고 했다. 또한 경계할 것은 마음에 있다(戒之在心)라고 했으니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사람의 양심에 있다는 말이다. 법과 도덕적 규범 이전에 사람의 마음에는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이미 서 있지만 사람들은 그 양심의 소리에 감응하지 못하여 쫓아가지 않는다. 그 보다는 세속의 이익에 목을 빼고 쫓아가 남을 해치고 속이고 사회에 폐해를 끼친다. 지도자는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배제하고 진실의 편에 서야 하며 개인은 떳떳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나와 남과의 유대를 지속하기 위하여 진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정한 마음과 청결한 행동으로 살아가야 한다.

 

 

 

 

 

 

 

권우상 기자 lsh8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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